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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1.30 병자호란과 남한산성, 그리고 삼전도의 굴욕

말로써 정의를 다툴 수 없고, 글로써 세상을 읽을 수 없으며,

살아있는 동안의 몸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을 다 받아 내지 못할진대,

땅 위로 뻗은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으리.……


임금은 서문으로 나와서 삼전도에서 투항했다.


길은 땅 위로 뻗어 있으므로 나는 삼전도로 가는 임금의 발걸음을 연민하지 않는다.


밖으로 싸우기보다 안에서 싸우기가 더욱 모질어서 글 읽는 자들은 갇힌 성 안에서 싸우고 또 싸웠고, 말들이 창궐해서 주린 성에 넘쳤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하는 말)’에서


 


그날 남한산성의 겨울은 추웠다.
새들도 날지 않고 종일 칼바람이 울었다.

 
성곽을 지키는 군졸 중에선 얼어 죽는 자가 잇따랐다.
일부 장졸은 행궁 밖에 모여 ‘끝까지 싸우자고 말하는 신하를 모두 청나라 진영에 보내버리라’고 울부짖었다.


병자년 그때 남한산성 안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사라졌다.

 
싸우다 죽은 자나,

투항해서 살아남은 자나

모두 땅 밑에 묻혔다.

 
그리고 그 후손들이 다시 남한산성을 찾는다.


모두 싸우다 죽은 자들의 영혼을 이었다.
무릎 꿇어 살아남은 자들의 몸을 받았다.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이제 지구상에 흔적도 없다.
그들에게 끌려간 60만 조선 백성도 자취가 사라졌다.


살아남아서 강한 것인가,

아니면 강해서 살아남은 것인가.

역사는 말이 없다.

 

 


738년전 병자년(1636년) 오늘(1/30일)은

조선 역사상 가장 끔찍한 사건 중의 하나인 ‘삼전도의 굴욕’이 있었던 날이다.

 

 

 

 


잠실 석촌호수 입구에는 삼전도비(三田渡碑)는

원래 이름이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이다.

청 태종에 무릎을 꿇고 항복한 인조가 청의 요구에 따라 1639년 청 태종의 공덕을 기리는 비를 세운것 이다.

비록 어명으로 비문을 새겼던 당대의 명필 '오준'은 붓을 쥐었던 손가락을 돌로 짓이기고, 이후 다시는 글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Posted by 지상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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