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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6.17 용서와 관용의 리더십 : 링컨과 스탠턴
  2. 2014.11.19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

1855년 6월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에드윈 M. 스탠턴(Edwin M. Stanton) 이라는 변호사가 있었다. 

 

그가 특허권 분쟁에 관한 중요한 소송에서 변호인단 일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는데, 스탠턴은 함께 변호인단으로 참여한 링컨을 보고 “왜 저 긴팔원숭이를 끌어들였느냐”라며 공공연히 무시했다. 

 

스탠턴은 4년제 대학을 졸업했고, 똑똑하고 유능해 꽤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링컨은 켄터키주 농촌에서 태어나 학교라고는 6개월밖에 다니지 못했다. 

 

스탠턴은 부리부리한 눈매에 이목구비가 반듯한 잘생긴 얼굴이었다. 
링컨은 야윈 얼굴에 주름이 많았고, 눈은 움푹 파였으며 어깨는 구부정했고 두 팔은 축 늘어져 있었다. 

 

스탠턴이 윤기가 흐르는 명품이었다면 링컨은 보잘것없는 시장 물건이었다
렇지 않아도 성격이 직선적이고 가끔 오만하기까지 했던 스탠턴은 촌뜨기 변호사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같은 호텔에 묵어도 스탠턴은 링컨을 무시하는 태도로 대했다. 

 

1861년 링컨은 공화당으로선 최초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민주당 중진인 스탠턴은 링컨과 그의 정책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그는 링컨에 대한 증오와 경멸을 끊임없이 뱉어냈다. 
링컨이 하류층의 인간이라는것부터 나약한 정치인일 뿐이라고 그는 말했다. 

 

워싱턴에서 처음 마주친 후 10여 년간 스탠턴은 그렇게 링컨의 날카로운 라이벌로 남았던 것이다
그해 4월 남북전쟁이 터졌다. 


링컨의 북군이 계속 밀리자 링컨은 군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인물을 찾고 있었다
링컨의 머릿속에 떠오른 인물은 다름 아닌 변호사 시절부터 자신을 무시해온 정적 스탠턴이었다. 
링컨은 스탠턴이 비사교적 성격이지만 누구보다도 애국적이며 일에 열정을 바친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공화당 사람들을 비롯해 스탠턴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많은 이가 반발했다. 
모두들 대통령의 결정에 당황하며 언젠가 스탠턴이 당신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링컨은 단호했다. 
“스탠턴만 한 장관감을 데리고 오라. 그럼 쓰겠다.” 

 

링컨은 그가 살아온 신념 그대로 원수를 사랑해야한다며 결국 그를 전시 국방장관(Secretary of War)에 임명했다
반발 분위기를 아는 스탠턴은 처음엔 장관직을 별로 내켜 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수락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스탠턴은 그때부터 링컨의 곁에서 언제나 그를 보호하고 지키는 절친한 친구이자 동반자가 되었다
스탠턴은 지나치리만큼 애국심이 강하고 고지식할 만큼 정직했기 때문에 군대를 엄격히 관리했다
그는 청탁인들을 냉정히 다뤘으며, 좀 더 공격적인 전쟁 수행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북군은 전쟁에서 승리했고, 스탠턴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시국방장관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1865년 링컨은 워싱턴 시내 포드극장에서 공연을 보다 암살범 부스가 쏜 권총에 맞았다. 
링컨은 길 건너편에 있는 가정집 1층 침대에 눕혀졌다. 
많은 각료들이 달려와 침대 곁을 지켰다
그러나 누구보다 오래 그의 곁에 머문 사람은 스탠턴이었다. 

 

그리고 링컨이 죽었을때 그는 링컨의 시신을 부여잡고 울며 외쳤다. 
“가장 위대한 사람이 여기 누워있다. 시대는 변하고 세상은 바뀔지라도 이 사람은 온 역사의 재산으로 남을 것이다. 이제 그 이름 영원하리.” 

 

링컨의 진정한 리더십은 바로 이 에드윈 M. 스탠턴을 중용한 데서 잘 드러난다
링컨은 스탠턴이 정직하고 엄격하며 원칙을 밀고 나가는 스타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스탠턴은 과연 링컨의 기대대로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했다. 

 

 

 

 

Posted by 지상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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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즈버그는 남북전쟁 당시 최대의 격전지였다.
북군과 남군 합쳐 16만 명 이상이 참전해 5만여 명이 전사했다.

 

 

전투 현장에 지어진 국립묘지에서 링컨은 개관 기념 연설을 했다.

그러나 링컨은 주 연설자가 아니었다.
당대의 명연설가 에드워드 에버렛 국무장관이 주 연설자였다.

 

 

 

에버렛은 링컨에 앞서 2시간이 넘게 연설했다.

에버렛은 나중에 편지를 보내 “대통령께서 2분 동안 한 것처럼 저도 2시간 동안 개관 행사를 빛나게 할 훌륭한 연설을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라고 고백했다.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은 세계 역사의 고비 때마다 다시 등장했다.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는 1963년 워싱턴 링컨기념관 앞에서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연설을 한다.

이 연설의 첫 머리의 “백 년 전, 한 위대한 미국인이…”는 100년 전 게티즈버그에서 연설한 링컨을 지칭한다.

 

프랑스 헌법(1958년 제정)은 프랑스공화국의 설립 원칙으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규정했다.

 

버락 오바마는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뒤 “우리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지구상에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게티즈버그 연설은 272개 단어로 이루어진 짤막한 문장 속에 민주주의 이념을 압축했다.

 

국민의 민주정부 수호 의무와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헌신 의지를 담았다.

남북전쟁은 국가 통합을 위한 싸움이자 자유의 재탄생 과정으로 규정된다. 이를 위해 링컨은 연설을 게티즈버그라는 싸움터에서 시작하는 대신 미국이란 나라의 탄생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쟁만큼이나 혹독했던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미국을 탄생시킨 독립선언서의 자유와 만인 평등이라는 원칙의 소중함을 일깨운 것이다

 

링컨은 미국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정적이라도 능력만 있으면 내각에 끌어들였다. 그래야 흑인 노예 제도를 놓고 갈라진 미국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은 링컨의 내각을 ‘라이벌 팀’이라고 할 정도였다. 링컨의 리더십은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미 독립 이후 뜨거운 감자였던 노예 문제를 해결했다.

 

미국 남북전쟁(1861~65)이 진행되고 있던 1863년 11월19일(오늘),

링컨은 전쟁의 전환점이 된 혈전지 게티스버그(펜실베이니아 주)를 방문하고 전몰자 국립묘지 봉헌식에 참석한다.

 

그 식전에서 그는 불과 2분간의 짧은 연설을 행하는데, 그것이 유명한 '게티스버그' 연설이다. 원문으로 총 266 단어의 이 연설문은 다음날 게티스버그 신문에 실리고 미국사의 기념비적 텍스트의 하나로 전해지게 된다.

 

이 연설문은 많은 일화를 갖고 있다.

링컨에 앞서 두 시간 연설했던 웅변가 에드워드 에버렛(Edward Everett)이 『나는 두 시간 연설했고 당신은 2분 간 연설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두 시간 연설이 묘지 봉헌식의 의미를 당신의 2분 연설처럼 그렇게 잘 포착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라고 탄식했다는 것도 그런 일화의 하나이다.

 

링컨이 게티스버그로 가는 열차 안에서 편지 봉투 겉면에 서둘러 쓴 것이 이 연설문이라는 이야기도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화이기보다는 만들어진 전설이다.

링컨이 신임했던 기자 노아 브룩스(Noah Brooks)에 따르면 봉헌식 며칠 전 백악관 집무실에서 대통령이 『연설문을 초안했으나 아직 완성하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한다.

 

 

링컨의 성격, 연설문이 지닌 고도의 짜임새, 어휘 선택과 수사적 구도 등을 보면 이 연설문은 한 순간의 영감 어린 작품이기보다는 링컨이 상당한 시간을 바쳐 조심스레 작성한 문건이라는 판단을 갖게 한다.

 


Posted by 지상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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