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어느날. 상점에서 빵을 훔쳐 절도혐의로 기소된 할머니의 재판이 진행되고 있었다.
"피고는 전에도 빵을 훔친 적이 있습니까?" "아니오. 처음 입니다."
"그렇다면 왜 훔쳤습니까?" "일자리도 없고 배식도 끊기고 일주일 넘게 굶은 손자가 죽어가는 걸 보고 있을 수 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행동은 명백한 범죄입니다. 알고 있습니까?" "예 알고 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당신은 이곳을 나가면 다시는 빵을 훔치지 않겠다고 맹세할 수 있습니까?" "네? 아 그, 그건 약속할 수 없습니다."
판사는 잠시 후에 최종 판결을 내렸다.
"피고의 딱한 사정은 이해하지만 법은 만인에게 평등해야 하므로 피고 애니 돌로레스에게 벌금 10달러를 선고합니다."
할머니의 딱한 사정을 감안하여 판사가 용서해줄 것으로 알았던 방청석에서는 판결이 너무 가하다고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피고는 재판장을 나가면 또 다시 빵을 훔치게 되어 있습니다. 굶어 죽을 수는 없기 떄문이지요. 그러나 피고가 빵을 훔친 것은 피고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피고가 생존을 위해 빵을 훔쳐야만 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임에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 뉴욕 시민 모두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판사로서 큰 책임을 느끼는 바 본 판사에게도 10달러의 벌금형을 내리는 동시에 이 법정에 있는 시민 여러분들께도 50센트의 벌금형에 동참해주실 것을 권고하는 바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 지갑에서 10달러를 꺼내어 집행관에게 전달했다. 판사의 놀라운 선고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해서 거두어진 돈이 모두 57달러 50센트였다.
판사는 그 돈을 노인에게 주도록 했다. 할머니는 돈을 받아서 10달러를 벌금으로 내고, 남은 47달러 50센트를 손에 쥐고 감격의 눈물을 글썽거리며 법정을 떠났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톡특한 판결을 내린 '피오렐로 라과디아" 판사 이야기다.
당시 그는 할머니를 처벌하는 대신 그 고통을 시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명판결을 내렸고 이 사건은 미국에서도 유례가 없는 판결로 당대 큰 이슈가 되었다.
그 후로도 피오렐로 라과디아는 원리원칙을 고수하며 부정부패와 맞서 싸웠고 시민들의 삶과 존엄성을 최우선으로 16년간 인간적인 판사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
얼마후 법조계를 떠난 그는 뉴욕 시장에 출마했는데 선거 공약으로 마피아와의 전쟁을 선포했고 불안과 공포에 떨고있던 뉴욕시민들은 환호했다.
1930년대 당시 뉴욕은 이탈리아에서 넘어온 마피아들이 살인, 매춘, 도박 등 온갖 범죄를 일으키며 도시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시민들은 매일같이 불안과 공포에 떨었고 뉴욕은 당시 48개주 가운데서 가장 위험한 도시로 손꼽혔다.
결국 라과디아는 그 공약으로 시민들의 지지를 이끌어 냈고 시장에 당선되었다.
뉴욕 시장에 당선된 직후 라과디아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성대한 취임식 파티가 아니라 작고 허름한 라디오 부스였다.
실제 라과디아는 시장 취임 첫날, 라디오 연설을 통해 마피아들에게 선전포고를 했고 즉각 행동에 옮겼다.
가장 먼저 부패한 경찰조직을 개편했고 당시 마피아의 주요 수입원이었던 불법 슬롯머신을 뿌리뽑기 위해 "찾아서 부셔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대대적인 소탕작전에 들어갔다.
라과디아는 마피아들의 협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특별 검사를 소집했고 더 강경하게 대응하며 당시 마피아 보스였던 '찰스 루치아노'를 매춘법으로 기소해 무려 50년형을 받아냈고 마침내 뉴욕내 마피아 조직을 와해시켰다. 뉴욕 시민들은 기쁨의 축배를 들며 라과디아를 환영했다.
마피아를 몰아내자 뉴욕의 치안은 안정을 되찾고 훨씬 안전한 도시가 되었지만 여전히 시민들은 빈곤했고 뉴욕의 경제적 불황은 해소되지 않았다.
그러나 뉴욕의 치안을 안정시킨 라과디아의 인기는 급상승했다. 공화당 내에서도 라과디아를 차기 당 지도자로 추대했다.
하지만 라과디아는 자신의 당인 공화당의 정책을 버리고 상대당인 민주당의 정책을 지지한다는 깜짝 발언으로 놀라움을 자아냈다. 그러자 공화당내 사람들은 라과디아가 배신자라며 맹렬히 비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대공황으로 발생된 대규모 실업난을 해결하기 위해 당장 수많은 사람들의 일자리 창출이 시급했고 상대당이지만 민주당의 뉴딜정책이야 말로 뉴욕에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시민들의 삶이 최우선이라 생각했던 그는 루즈벨트로부터 약 11억달러의 지원금을 받아 뉴욕의 경제를 회복시켰다.
그후 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1933년부터 1945년까지 3번의 연임을 거듭해 뉴욕을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들었다.
그는 시장 임기가 끝난 후 죽을 때까지 뉴욕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의 이러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뉴욕의 맨하튼에서 13km쯤 떨어진 잭슨 하이츠에 그의 이름을 따서 '라과디아(La Guardia Airport) 공항'이 만들어졌다.
"우리 형편에 무슨 서울 유학이니? 괜히 헛바람 들어서 그러지 말고 사범학교 시험 쳐서 형처럼 선생이 돼라."
서울에 가고 싶은 나의 간절한 꿈은 어머니의 한마디에 깨지고 말았다. 1929년, 내 나이 열두 살이었다.
나는 황해도 은율 산골짜기에서 태어나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형, 누나와 함께 밀죽으로 끼니를 때우는 배고픈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사를 밥 먹듯 했고, 열 살 무렵 보통학교에 다닐 때에는 월 수업료 60전을 못 내 등교 정지까지 당했다. 어머니는 누에치기, 콩밭 매기, 품삯 일로 모질게 자식 공부를 시켰다.
나는 보통학교 졸업 후 어머니 소원대로 황해도 도립 사범학교 시험을 쳤다. 그러나 보기 좋게 낙방했다. 이듬해 치른 평양 관립 사범학교 시험에도 미끄러지고 말았다. 집에 돌아갈 염치가 없던 나는 평양에 남아 목욕탕 잡부, 모자점 사환 등을 전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등사기(謄寫機) 영업 사원이던 외사촌 형님의 소개로 평양 기성 의학 강습소 사환으로 취직했다. 당시 열다섯 살, 내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꾼 등사기와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온종일 의학 교재를 잉크로 등사하는 게 내 업무였다. 매일 3000장을 검정 잉크를 묻힌 롤러 붓으로 한 장 한 장 등사해야 했다. 처음엔 기계적으로 등사하기 바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교재 내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무슨 소린지 몰랐으나 날마다 똑같은 교재를 반복해 등사하다 보니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교재를 읽는 양도 늘어나 하루 50쪽까지 읽기도 했고 나중엔 주말에 도서관을 찾아 의학 서적을 탐독하기까지 이르렀다.
1930년대 당시 의사가 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세브란스의전 같은 의대를 졸업하거나, 의학 강습소 같은 곳을 수료하고 의사 검정고시에 합격하는 것이다.
그러던 중 한 수강생으로부터 병원이나 관련 기관에서 5년 근무 경력이 있으면 응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평양에 오기 전 황해도 송화의원에서 일한 경력에 의학 강습소 경력을 합치니 응시 자격이 됐다. 그때부터 등사기를 대하는 내 태도는 180도 바뀌었다. 교재 한 장 한 장에 꿈과 목표를 담아 정성스레 등사하며 밤낮으로 시험 준비에 몰두했다. 오직 가난과 배고픔에서 벗어나고 싶은 열망 하나로 의사 시험을 준비했다. 등사기와 처음 만난 이후 4년 만인 1936년 의사 검정고시 14과목을 모두 통과해 19세 최연소 나이로 합격했다. '등사기'와 맺은 인연이 나를 의사로 만들고 서울까지 오게 한 것이다.
1937년 나는 당시 모든 의사가 근무하고 싶어 했던 명동 성모병원의 견습 의사로 새 인생의 첫걸음을 뗐다. "닥터 정!" 당시 원장이 나를 부르던 호칭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평양 목욕탕에서 "야!"로 불렸던 내가 "닥터!"라니.
그곳에서 나는 등사기만큼이나 운명적인 만남을 또 한 번 가졌다. 신의주에서 어머니 등에 업혀 온 갓난아기였다. 아기는 배가 불룩 솟아 있고 묽은 녹색 변을 계속 쏟아내는 '장기 설사병' 환자였다. 힘겹게 생명을 이어가는 아기의 고통스러운 모습에도 병원장을 포함해 의사 단 한 명도 원인을 모른 채 속수무책이었다. 아기는 결국 죽고 말았다. 죽어가는 아기를 지켜보며 아무런 손을 쓰지 못하는 의사로서 무력감과 죄책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이후로도 여러 장기 설사병 갓난아기를 무기력하게 사지로 떠나보냈고, 6·25전쟁 후 서울 회현동에서 개업한 병원에서도 똑같은 일을 겪었다. 그러니 장기 설사병의 원인에 대한 의문은 내게서 떠날 수가 없었다. 결국 해답을 찾는 방편으로 아내와 6남매를 남겨두고 43세 나이에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반년을 계획한 유학이었지만 해답을 찾지 못한 나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유학 5년째인 1964년에야 U.C.메디컬센터 도서관에서 의문을 푸는 논문과 조우했다. 신의주에서 온 첫 번째 갓난아기 환자를 만난 지 27년 만이었다.
장기 설사병의 원인은 유당 불내증이었다. 이 병은 선천적으로 유당 분해효소가 없는 아이가 모유나 우유를 소화하지 못하면서 창자 점막에 염증이 생겨 구토와 설사를 반복하다 영양실조로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신의주에서 온 아기도 선천적으로 몸에 락타아제라는 유당 분해효소가 없어서 엄마 젖을 먹다가 죽은 것이었다.
귀국 후 유당 불내증 치료법을 찾기 위해 밤낮없이 연구에 매달렸다. 결국 유당이 없는 영양 식품이 '콩'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콩국에 영양소를 첨가한 음식으로 병원을 찾는 장기 설사병 아기들을 살릴 수 있었다. 이것이 1966년 '베지밀'의 시초가 됐다. 이 과정에서 숱한 어려움이 많았다. 유학 기간 생활비와 학비를 대려고 아내는 빚을 얻다 병원을 빼앗기기도 했다. 베지밀 대량 생산에 필요한 기계 제작과 자본 조달의 어려움 등, 그동안 겪은 고난과 시련은 형언할 수가 없다.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한 것은 어린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의료인으로서 지닌 직업적 사명과 열정, 아무도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도전 정신 덕분이었다. 환경이 어렵다고 쉽게 포기하기보다는 이를 극복하려는 열정과 패기, 돈과 인기가 아닌 직업적 사명을 갖고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며 공부하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누구에게나 희망은 있다는 것을 배웠다.
인생의 끝자락에 서있는 지금 나는 인류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대체 식품으로서 두유의 이로움을 널리 알리고자 오늘도 평생 끝나지 않을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1855년 6월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에드윈 M. 스탠턴(Edwin M. Stanton) 이라는 변호사가 있었다.
그가 특허권 분쟁에 관한 중요한 소송에서 변호인단 일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는데, 스탠턴은 함께 변호인단으로 참여한 링컨을 보고 “왜 저 긴팔원숭이를 끌어들였느냐”라며 공공연히 무시했다.
스탠턴은 4년제 대학을 졸업했고, 똑똑하고 유능해 꽤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링컨은 켄터키주 농촌에서 태어나 학교라고는 6개월밖에 다니지 못했다.
스탠턴은 부리부리한 눈매에 이목구비가 반듯한 잘생긴 얼굴이었다. 링컨은 야윈 얼굴에 주름이 많았고, 눈은 움푹 파였으며 어깨는 구부정했고 두 팔은 축 늘어져 있었다.
스탠턴이 윤기가 흐르는 명품이었다면 링컨은 보잘것없는 시장 물건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성격이 직선적이고 가끔 오만하기까지 했던 스탠턴은 촌뜨기 변호사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같은 호텔에 묵어도 스탠턴은 링컨을 무시하는 태도로 대했다.
1861년 링컨은 공화당으로선 최초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민주당 중진인 스탠턴은 링컨과 그의 정책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그는 링컨에 대한 증오와 경멸을 끊임없이 뱉어냈다. 링컨이 하류층의 인간이라는것부터 나약한 정치인일 뿐이라고 그는 말했다.
워싱턴에서 처음 마주친 후 10여 년간 스탠턴은 그렇게 링컨의 날카로운 라이벌로 남았던 것이다. 그해 4월 남북전쟁이 터졌다.
링컨의 북군이 계속 밀리자 링컨은 군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인물을 찾고 있었다. 링컨의 머릿속에 떠오른 인물은 다름 아닌 변호사 시절부터 자신을 무시해온 정적 스탠턴이었다. 링컨은 스탠턴이 비사교적 성격이지만 누구보다도 애국적이며 일에 열정을 바친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공화당 사람들을 비롯해 스탠턴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많은 이가 반발했다. 모두들 대통령의 결정에 당황하며 언젠가 스탠턴이 당신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링컨은 단호했다. “스탠턴만 한 장관감을 데리고 오라. 그럼 쓰겠다.”
링컨은 그가 살아온 신념 그대로 원수를 사랑해야한다며 결국 그를 전시 국방장관(Secretary of War)에 임명했다. 반발 분위기를 아는 스탠턴은 처음엔 장관직을 별로 내켜 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수락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스탠턴은 그때부터 링컨의 곁에서 언제나 그를 보호하고 지키는 절친한 친구이자 동반자가 되었다. 스탠턴은 지나치리만큼 애국심이 강하고 고지식할 만큼 정직했기 때문에 군대를 엄격히 관리했다. 그는 청탁인들을 냉정히 다뤘으며, 좀 더 공격적인 전쟁 수행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북군은 전쟁에서 승리했고, 스탠턴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시국방장관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1865년 링컨은 워싱턴 시내 포드극장에서 공연을 보다 암살범 부스가 쏜 권총에 맞았다. 링컨은 길 건너편에 있는 가정집 1층 침대에 눕혀졌다. 많은 각료들이 달려와 침대 곁을 지켰다. 그러나 누구보다 오래 그의 곁에 머문 사람은 스탠턴이었다.
그리고 링컨이 죽었을때 그는 링컨의 시신을 부여잡고 울며 외쳤다. “가장 위대한 사람이 여기 누워있다. 시대는 변하고 세상은 바뀔지라도 이 사람은 온 역사의 재산으로 남을 것이다. 이제 그 이름 영원하리.”
링컨의 진정한 리더십은 바로 이 에드윈 M. 스탠턴을 중용한 데서 잘 드러난다. 링컨은 스탠턴이 정직하고 엄격하며 원칙을 밀고 나가는 스타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스탠턴은 과연 링컨의 기대대로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