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오른 장제스는 공산당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장제스는 공산당을 불법 단체로 규정한 뒤 6,000명을 처형, 이는 공산단 80%에 해당하는 엄청난 수치였다.


마오쩌둥은 살아남은 공산당원들과 함께 장제스의 국민당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장제스의 국민당에 비해 턱없이 적은 규모의 병력이었다. 이에 마오쩌둥은 한 가지 묘안을 떠올리게 된다. 그것은 중국 농민들의 민심을 공략하는 것이었다.


당시 장제스의 국민당은 농민들을 약탈해 부를 축적하고 있었고 농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던 상황. 이를 잘 알고 있던 마오쩌둥은 토지개혁을 실시해 지주들의 토지를 빼앗에 농민들에게 나눠줬다. 마오쩌둥은 농민을 중심으로 급속히 세력을 확장했고 파죽지세로 장제스의 국민당을 상대로 승리를 눈 앞에 두게 됐다.


하지만 장제스가 배를 이용해 중국을 탈출하자 마오쩌둥은 장제스를 없애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의 뒤를 쫓았고 결국 도망치는 장제스의 배를 함락시킬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얻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장제스를 죽이지 못했다. 마오쩌둥은 장제스가 가진 보물이 수장되는 것을 두려워 했던 것이다. 장제스의 배에 실려 있던 보물은 배추 모양 비취 추이위바이차이, 3대에 걸쳐 상아를 조각한 상아투화운룡문투, 옥석을 가공해 만든 육형석(肉形石)까지 돈으로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유물들이었다.


장제스는 1925년 일본이 만주성까지 침범하며 영토를 넓혀가자 보물을 지키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펼쳤다. 장제스는 보물을 장쑤성 상하이 난징에 충칭까지 이동시켰고 이는 15년간 계속됐다.


장제스는 여기에 자금성에 보관돼 있지 않은 다른 보물들까지 찾아나섰다. 직속 부대에게 명령을 내려 청나라 황제 건륭제아 서태후 묘를 도굴하도록 했다. 묘 안에 소장돼 있던 보물 수백 점을 손에 넣기도 했다.


보물만 있으면 장제스는 자신의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1949년 장제스는 자신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대만으로 중국의 배 두척에 보물 3,900여 상자를 실어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장제스 보물 수송 작전은 한계에 부딪쳤다. 4,000여 상자가 남아있었지만 운송 수단이 부족했기 때문인데.


결국 장제스는 미국으로부터 중국인들을 공산장에게 구출해낸다는 거짓말로 수송선 5척을 지원받았고 수송선에 남은 보물들을 실은 뒤 자신도 대만으로 도주했다. 이 때문에 마오쩌등은 장제스를 살려줘야만 했다.


대만으로 도망친 장제스는 중국의 정통성을 내세워 총통으로 타이페이에 국립고궁박물원을 건설한 뒤 보물을 옮겼다. 현재 국립박물관에는 69만 점의 중국 국보급 보물들이 보관돼 있다. 공간 부족으로 5,500점이 3개월마다 교체되고 있으며 모두 관람하려면 30년이 걸린다고 한다.


일본군으로부터 국보급 보물을 지켜낸 장제스,

또 그런 장제스를 보물 때문에 죽이지 못한 마오쩌둥.

평생의 원수였던 두 사람 때문에 중국 보물은 무사히 후대까지 전해져 내려올 수 있었다.


1949년 12월 8일(어제)은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쫓겨간 날이다.

 

 

 

Posted by 지상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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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은 그의 전재산을 털어 우리 문화재가 일본에 유출되는 것을 막았다.

 

그가 문화재를 집중적으로 수장하던 1930∼40년대는 일제의 수탈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였는데,

문화재 감식에 뛰어난 오세창과 함께 모은 것이 '청자상감운학매병'(국보 68호)·'혜원전신첩'(국보 135호) 등 12점의 국보와 10점의 보물 등 다수의 문화재였다.

 

그중 가장 눈여겨봐야할 것은 1943년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제70호,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을 손에 넣던 이야기가 유명하다.

 

당시로선 존재 사실만 알려져 있던 훈민정음 해례본이 경북 안동에서 나왔는데...

표지 2장에 본체 33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로 20센티미터, 세로 32.3센티미터 크기이고, 처음 두 장이 망실된 상태였다고 한다. ​

 

간송은 소장인이 훈민정음 해례본인줄 알면서도, 그 가치를 알지 못하여 생활고 때문에 1,000원으로 내 놨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당시 1,000원은 서울의 기와집 한 채 값으로, 고서 가격치곤 비싸다는 주위에 만류에도 불구하고 해례본 값으로 10,000원을 쳐 주며,

 

"훈민정음 같은 보물은 적어도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후 훈민정음 해례본은 간송에겐 지켜야할 목표로서 6‧25 전쟁 당시에도 오직 이 책 한권을 오동나무 상자에 넣고 피란을 떠났으며, 잘 때도 베게삼아 잤다고 한다.

 

1943년 <훈민정음 해례본>이 간송 전형필에 의해 발견되기 전까지 그 누구도 훈민정음의 창제원리를 알지 못했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통해 살펴본 창제원리에는 세종의 백성 사랑과 우주의 이치를 담겨 있다는 사실이밝혀졌다.

 

창제시 “고전(古篆, 옛글)을 모방했다.”는 말에 따라 여러 학설이 있었는데, 인도 구자라트 문자나 산스크리스트어, 몽골의 파스파문자, 갑골문자를 모방했다는 설부터 문고리나 창살모양을 본 땄다는 설까지 분분했다.

 

물론 해례본에서는 옛 글자들에서 일부 글자는 모양을 따왔다는 내용도 있지만,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며 사람은 세모나다.는 천지인 삼재(三才)의 원리와 태극, 음양오행의 원리를 담고 있음이 밝혀졌다.

 

첫음(자음)이 발성기관의 모양을 본떴으며, 가운데 소리(모음)는 하늘‧땅‧사람을 뜻하는 천지인을 바탕으로 했다. 점과 선으로 모든 모음을 표시했던 것이다.

 

가장 간단한 것으로 매우 복잡한 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가히 천재적인 업적이라 평가할 만하다.

 

<세종실록> 세종28년(1446) 9월 29일자에 나타난 당시 예조판서 정인지의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을 보면, 세종임금이 백성을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다”했고“바람소리, 학의 울음, 닭울음소리나 개 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표현해 쓸 수 가 있다”고 하였다.

 

한글의 우수성이기도 하지만 백성이 막힘없이 쓸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그대로 베어 나온다. 또한 훈민정음으로써 송사(訟事)를 판단하게 하여, 각종 행정조치나 형벌에서 글을 몰라 억울한 백성이 없도록 하려 했다.

 

집현전 학자 여덟 명에게 새로 만든 목적과 원리 그리고 글꼴을 결합하여 표기한 방법을 설명하는 해례본을 지은 이유도“스승이 없어도 스스로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다.

 

당대에 문자를 새로 만들고 이를 쓸 가난한 백성의 사정까지 두루 살펴 편이하게 하려는 노력은 한 나라의 지도자가 어떤 덕성을 가져야 하는지 보여준다.

 

참으로 자랑스러운 우리민족의 역사요 우리의 글이다.

 

훈민정음 해례본 (訓民正音解例本)은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부르며,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있고, 1997년 10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내용은“國之語音異乎中國(나라말미 듕귁에 달아...)”로 시작하는 세종어제 서문과 본문에 해당하는 예의(例義) 및 해례(解例) 그리고 정인지가 쓴 서(序)로 구성되어 있다.

 

 

 

 

 

 

 

 

 

 

 

 

Posted by 지상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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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진 미군은 1950년 12월 미군과 국군 병력 10만 명을 후퇴시키는 흥남철수 작전을 펼친다.

 

영하 20도의 혹한과 코앞까지 들이닥친 중공군의 공세 속에서 10만 명의 병력을 옮기는 일도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피난민까지 수송할 계획은 없었다.

 

그러나 이 작전을 지휘한 미군 10군단 알몬드 사령관 옆에는 현봉학이라는 한국인 고문이 있었다. 그는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28살의 젊은 의사였다.

 

그는 사령관에게 피난민도 함께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지만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군인과 장비만 후송하기에도 모자란 판에 피난민을 태울 여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봉학을 밤낮으로 끈질기게 사령관을 찾아가 애원하고 또 설득했다.

 

이를 지켜본 참모장 포니 대령은 장비 사이의 공간을 활용하면 4000여병의 피난민을 실어 나를 수 있다고 보고했다.

 

결국 사령관은 현봉학과 포니 대령의 의견을 받아들여 역사상 유례가 없는 피난민 수송작전을 감행하게 된다.

 

크리스마스이브인 12월 24일 흥남 부두를 마지막으로 출발한 배는 미국의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였다.

 

미군은 군수물자를 포기하고 그 자리에 피란민을 태웠다. 2,000명 이상은 탈 수 없다던 이 배에는 14,000명의 피란민이 가득 탑승했다.

이는 가장 많은 인원을 태운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이렇게 남한으로 내려온 피난민은 모두 9만8000명에 달했다.

그중에는 국제시장 장사치를 했던 금순이 오라버니도 포함되었다.~^^

 

영화 '국제시장' 도입부에 등장하기도 했던 이 장면이 너무나 애잔하게 느껴지더라구요!

 

2007년 11/25일(오늘)은

‘한국의 쉰들러‘ 현봉학 박사가 85세를 일기로 돌아가신 날이다.

 

http://youtu.be/_JchUVDRkII

 

http://youtu.be/Cb5_tWTuU6I

 

 

 

 

 

 

 

 

 

 

 

Posted by 지상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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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 개돼지만도 못한 이른바 정부대신이란 자들은 자기의 영달과 이익을 바라고

위협에 겁을 먹고 머뭇거리고 벌벌 떨면서 나라를 팔아먹은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던 것이다. 
 
아, 사천년의 강토와 오백년의 사직을 남에게 들어 바치고

이천만 동포는 모두 남의 노예 노릇을 하게 되었으니...  
 
아! 원통하고 분하도다.

우리 이천 만 동포여! 살았느냐 죽었느냐.

사천년의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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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유명한 위암 장지연의 '시일야 방성대곡(이날을 목놓아 통곡하노라)'이라는 사설의 일부 내용입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이 같은 신문 사설을 써서 일본의 흉계를 통박하고 친일 정부대신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나라잃은 원통함과 분노를 격렬하게 표현한다.  
 
이로 인해 일본 관헌에 잡혀 3개월간 투옥되었다가 1906년 1월 24일 65일만에 석방되었다.

1913년부터 마산에서 생활했으며, 1921년 58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치게 된다.

마산합포구 현동에 묘가 있다. 
 
그러나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조선총독부 기관지 구실을 한 '매일신보'에 기고자로 참여하여 친일 성향의 시와 산문을 발표하며 말년에는 일본 제국주의 지배에 순응하여 협력했다는 연구결과가 알려지면서 친일행적을 두고 많은 비판을 받고 있으며,  
 
1962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지만 2013년 국가보훈처가 서훈을 취소했다. 
 
이에 유족들은 "장지연 선생의 행적이 서훈 취소 사유가 되지 않을 뿐더러 국가보훈처는 취소 권한이 없다"며 소송을 제기했고,  
 
1·2심은 "국가보훈처에 서훈을 취소할 권한이 없다"며 원고 승소 판결했지만  
 
2014년 10월 13일 대법원은 독립유공자서훈취소결정 무효확인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원고 패소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에 환송했다고 밝혔다. 

 

 아! 시작이 좋으면 끝도 좋아야 하는데...
안타깝네요!

Posted by 지상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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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즈버그는 남북전쟁 당시 최대의 격전지였다.
북군과 남군 합쳐 16만 명 이상이 참전해 5만여 명이 전사했다.

 

 

전투 현장에 지어진 국립묘지에서 링컨은 개관 기념 연설을 했다.

그러나 링컨은 주 연설자가 아니었다.
당대의 명연설가 에드워드 에버렛 국무장관이 주 연설자였다.

 

 

 

에버렛은 링컨에 앞서 2시간이 넘게 연설했다.

에버렛은 나중에 편지를 보내 “대통령께서 2분 동안 한 것처럼 저도 2시간 동안 개관 행사를 빛나게 할 훌륭한 연설을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라고 고백했다.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은 세계 역사의 고비 때마다 다시 등장했다.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는 1963년 워싱턴 링컨기념관 앞에서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연설을 한다.

이 연설의 첫 머리의 “백 년 전, 한 위대한 미국인이…”는 100년 전 게티즈버그에서 연설한 링컨을 지칭한다.

 

프랑스 헌법(1958년 제정)은 프랑스공화국의 설립 원칙으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규정했다.

 

버락 오바마는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뒤 “우리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지구상에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게티즈버그 연설은 272개 단어로 이루어진 짤막한 문장 속에 민주주의 이념을 압축했다.

 

국민의 민주정부 수호 의무와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헌신 의지를 담았다.

남북전쟁은 국가 통합을 위한 싸움이자 자유의 재탄생 과정으로 규정된다. 이를 위해 링컨은 연설을 게티즈버그라는 싸움터에서 시작하는 대신 미국이란 나라의 탄생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쟁만큼이나 혹독했던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미국을 탄생시킨 독립선언서의 자유와 만인 평등이라는 원칙의 소중함을 일깨운 것이다

 

링컨은 미국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정적이라도 능력만 있으면 내각에 끌어들였다. 그래야 흑인 노예 제도를 놓고 갈라진 미국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은 링컨의 내각을 ‘라이벌 팀’이라고 할 정도였다. 링컨의 리더십은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미 독립 이후 뜨거운 감자였던 노예 문제를 해결했다.

 

미국 남북전쟁(1861~65)이 진행되고 있던 1863년 11월19일(오늘),

링컨은 전쟁의 전환점이 된 혈전지 게티스버그(펜실베이니아 주)를 방문하고 전몰자 국립묘지 봉헌식에 참석한다.

 

그 식전에서 그는 불과 2분간의 짧은 연설을 행하는데, 그것이 유명한 '게티스버그' 연설이다. 원문으로 총 266 단어의 이 연설문은 다음날 게티스버그 신문에 실리고 미국사의 기념비적 텍스트의 하나로 전해지게 된다.

 

이 연설문은 많은 일화를 갖고 있다.

링컨에 앞서 두 시간 연설했던 웅변가 에드워드 에버렛(Edward Everett)이 『나는 두 시간 연설했고 당신은 2분 간 연설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두 시간 연설이 묘지 봉헌식의 의미를 당신의 2분 연설처럼 그렇게 잘 포착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라고 탄식했다는 것도 그런 일화의 하나이다.

 

링컨이 게티스버그로 가는 열차 안에서 편지 봉투 겉면에 서둘러 쓴 것이 이 연설문이라는 이야기도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화이기보다는 만들어진 전설이다.

링컨이 신임했던 기자 노아 브룩스(Noah Brooks)에 따르면 봉헌식 며칠 전 백악관 집무실에서 대통령이 『연설문을 초안했으나 아직 완성하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한다.

 

 

링컨의 성격, 연설문이 지닌 고도의 짜임새, 어휘 선택과 수사적 구도 등을 보면 이 연설문은 한 순간의 영감 어린 작품이기보다는 링컨이 상당한 시간을 바쳐 조심스레 작성한 문건이라는 판단을 갖게 한다.

 


Posted by 지상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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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3년, 스웨덴에서 8남매중 4째로 태어난 알프레드 노벨

그는 형제들의 반 수가, 채 어른이 되지 못한 어린 나이로 죽는 모습들을 일찌기 경험했다.

34살 때,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당시 유럽의 최고부자'로 살았던 그였지만

자신의 발명품이 '전장에서 서로 사람들을 죽이고 죽는데' 사용되자 큰 고뇌에 빠졌다.
노벨은 극히 '과묵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1888년, 형 '루드비히의 죽음'은 더욱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때, 그 형이 살았던 프랑스의 신문사는 다음과 같은 제목을 적어 사망기사로 올렸다.

“Le marchand de la mort est mort”
- 죽음의 상인, 죽다...

그는 살아있으면서 자신의 사망기사를 읽게 되었고,

이를 통해, 사망후 자신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게 될 지를 미리 알게 된 사람의 고통스런 경험...

그는 자신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전쟁용 폭탄으로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의 이미지임을 새삼 깨달았다.

사실 그가 부자가 된 것은 전쟁용보다 훨씬 많았던 광산 및 건설용 다이나마이트 판매량 때문이었다.

당시로선 획기적인 흔들려도 터지지 않는 안전한 폭발물 다이너마이트 특허를 받은 1867년.

때마침 이어진 수에즈 운하 및 알프스 산맥 터널공사 등으로 사업은 번창했다.

그리고 오보가 나간지 7년후에 그가 적은 유언장에는,

자기재산의 94%를 '스웨덴 왕립과학원'에 의탁,
자신이 평생동안 관심을 가졌던 물리학, 화학, 생리학(의학), 문학분야와 평화등,
인간삶과 인류문명 발전에 공헌하는 사람들에게 상금을 전하겠다는 것.

그 결과,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의 상인'이라는 불명예스런 이름은 잊은 채,

그를 명예로운 '노벨상'을 만든 사람으로 기억하게 되었으니,

당시 프랑스 신문사가 적었던 그에 대한 통렬한 진실이, 그의 삶을 크게 성장시킨 것은 분명하다.

나는 어떤 사람으로 남을 건인가???

 

 

 

 

Posted by 지상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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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반기문 사무총장을 꼽았다. 
 
그는 1944년 대한민국 충북 음성의 농촌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때 미국에 가서 케네디 대통령을 만난 경험을 계기로 외교관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1970년 외무고시를 거쳐 외교부에 첫 발을 딛었다.
2000년 외교부 차관을 거쳐
2004년 대한민국의 외교부 장관에 올랐다. 
 
그리고 2006년 오늘(10/14일)
그는 마침내 제8대 UN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60여년전 도움이 절실했던 바로 그 나라에서 UN의 수장이 배출된 것이다. 

 

 

미국방문 당시 케네디 대통령을 만난 순간 외교관을 꿈꾸게 되었다는 반기문 UN사무총장

 

유엔 안보리의 만장일치로 결의되어 회원국 192개국의 박수를 받으며 임기 연임을 이루다.

 

유엔 총회에서 연설을 마친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는 반기문 UN사무총장

 

강남스타일 음악에 맞추어 싸이와 함께 말춤을 추는 반기문 UN사무총장

 
재미난 동영상 한편 감상하시죠~^^ 
 
★ 유창한 영어에 대한 한국인의 착각 ★

 

Posted by 지상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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