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아주 크고 신선한 충격을 느낀 기사를 보았는데

영화 국제시장에서 고모 역활로 나왔던 여배우...

사실 외모로 보면
왠만한 남자보다 더
남자같았던...

주인공은 아니지만
맛깔나는 감초연기를 했던
그녀였는데...

'라미란'이 확 달라 보인다.

 

 

 

 

 

 

 

 

 

 

 

 

 

 

 

Posted by 지상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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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는 같은 가사에 다른 선율을 붙인 곡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런데 짧으면 30분, 길면 1시간 이상의 음악이 같은 가사로 쓰여 있다면 어떨까?

그것도 우리가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유명한 음악가가 같은 가사에 곡을 붙였다면 말이다.


카톨릭 교회에서 사용되는 미사곡이 있다.

미사곡 중 ‘레퀴엠’이라는 장르가 있는데,

우리말로 ‘진혼곡’ 이라고도 한다.

망자에게 애도를 표하며 영원한 안식을 비는 미사곡이다.


얼마나 엄숙하고 예를 갖춰야 할지 짐작된다.
그래서 곡의 역활에 따른 이름, 순서 등을 형식으로 정해 놓았는데,

레퀴엠에 대부분 포함되는 부분으로

최후 심판을 묘사하는 ‘분노의 날(Dies Irae)’이 있다.


레퀴엠을 작곡한 대표적인 음악가로 모짜르트와 베르디가 있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1984년 아카데미 8개부문을 수상한 영화 ‘아마데우스’를 통해 기억할 수 있는데, 

가면을 쓰고 자신의 신분을 숨긴 살리에리가 모짜르트를 찾아와 레퀴엠 작곡을 의뢰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모짜르트는 끝내 이 곡을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결국 자신을 위한 진혼곡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또 한 사람

베르디의 레퀴엠은 잘 들어보면 어딘지 모르게 우리 귀에 익숙하게 느껴지는데,

바로 수많은 영화나 TV 프로그램에서 ‘분노’의 감정을 나타내는 데 자주 사용했던 음악이다.


둘의 차이도 흥미롭다.

베르디가 재난에 가까운 ‘분노’를 쏟아놓는다면,

모차르트는 쫓기는 듯한 공포와 초조감을 짙게 전달한다.


오늘(1/27일)은 두 사람에게는 아주 운명적인 날이다.

1756년 짤츠부르트에서는 모짜르트가 태어났고

1901년 베르디가 밀라노에서 세상을 떠난다.


한사람은 어릴 때부터 천재 음악가 소리를 들으며, 36년동안 600 여곡을 작곡하며 큰 명성을 얻기는 했지만 출발의 영광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또 한사람은 일생동안 26편의 오페라를 남겼다.

그의 주가는 계속 치솟아 나중에는 갑부가 된 보기드문 작곡가였다.

 

아내와 두 자녀를 잃은 슬픔 속에서도 베르디가 40일 동안 단숨에 작곡해낸 <리골레토>는 오페라 사상 드물게 보는 영광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유명한 아리아 <여자의 마음>은 초연 전에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이 곡을 절대로 사람들 앞에서 부르지 말라고 해놓고 비밀연습을 했답니다.

베르디의 생각대로 이 아리아는 일세를 풍미한 명가가 되었고 그의 명성은 더욱더 상승했다.

한때 그는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지만 자신을 음악가이자 농민의 아들이 뿐이라고 항상 자신을 낮추었다.

 


 

공연 수익금도 자선단체에 기부하였으며,

고향 부근에 가난한 사람을 위한 자선병원도 짓고,

고독한 노년의 음악인들을 위한 요양원도 지었다.


풍성한 음악적 결실과 뜨거운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베르디가 남기고 간 뚜렷한 발자취인 것이다.


거장의 죽음을 애도하기위해 수십만명의 인파가 몰렸으며,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오페라 나부코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연주되는 가운데

자신이 지은 음악인들을 위한 요양원 지하에 묻힌다.

 

모짜르트의 레퀴엠 감상하기

 

베르디의 레퀴엠 감상하기

 

모짜르트의 오페라 중 대표곡 감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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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디의 오페라 중 대표곡 감상하기


베르디의 오페라 중 대표곡 감상하기


Posted by 지상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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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머리 바람에 센데 관산 달은 밝구나

칼끝에 서릿발 차가워 고국이 그립도다.

삼천리 무궁화 동산에 왜적이 웬말이냐

진정 내가 님의 조국을 찾고야 말 것이다.


1920년 청산리 계곡에서 유인되어 들어온 일본군 3,300명을 일시에 섬멸하여 독립전쟁 사상 최대의 승리라 불리는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끈 김좌진 장군.


청산리, 그 처절했던 현장에도 꿋꿋했던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


85년전 내일(1/24일)은

그가 다른 이도 아닌,

같은 동포의 총탄에 쓰러져 간 날이다.

 

 

 

 

 

 

 

Posted by 지상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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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 때 배우로 데뷔하여
15년간 19편의 영화에 출연하여 빛나는 연기를 펼쳐보인 영화배우가 있다.

기괴한 얼굴분장과
그에 어울리는 광기어린 표정연기, 몸짓연기 등으로
2008년 개봉한 그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 흥행의 일등공신 역활을 톡톡히 해냈던 영원한 조커 '히스 레저'

이영화로 그는 2009년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하게 되지만,
시상식장에서 그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2008년 바로 오늘(1/22일)
맨하탄 자택에서 28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채 발견된다.

우울증과 극심한 수면장애를 치료하기 위해 먹던 약물에 급성중독을 일으킨 것.

완벽한 악인 조커가 되기 위해 조커로서 일기까지 쓰면서 철저히 조커로 몰입했던 배우

역활에 깊이 빠져들면서 결국 조커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안타까운 배우.

아직도 많은 팬들은 그를 그리워 하며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의 삶을 안타까워 하고 있다.

'히스 레저' 그의 노래 실력은?

 

 

 

 

 

 

 

 

 

 

 

 

 

Posted by 지상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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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으로 수많은 사람이 식량난에 시달렸던 시절.
어머니와 함께 이곳 저곳을 떠돌며 살던 한 소녀.

소녀를 구해준 것은 유니세프의 전신인 국제 구호기금이었다.
이 소녀가 바로 세계적인 배우 오드리 헵번이다,


은퇴후 조용한 삶을 살던 그녀는
자신의 인기와 명성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린시절
자신과 어머니를 구해준
유니세프의 친선대사를 자청하였다.

고령의 나이에도
전장이든 전염병 지역이든
직접 찾아가 구호활동을 펼치며
사랑을 전한 오드리 헵번.

배우로 살았던 때보다
더 많은 열정을 쏟으면서
나눔의 손길을 멈추지 않았던
오드리 헵번.

1993년 어제(1/21일)
63세를 일기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아! 보고싶은 . . .

그녀가 좋아했던 시 :

Posted by 지상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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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외모,

눈에 띠는 자신감.

육상선수이자 모델, 그리고 영화배우까지 겸한 '에이미 멀린스'
「피플」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50인』

그녀에게는 남들과 다른 점이 있는데...

 

 

 

 

 

 

 

 

 

 

 

 

 

 

 

 

 

 

 

 

 

 

 

Posted by 지상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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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임시정부 국무원 회의실에서 정부 요인들 사이에 논란의 대상이 된 젊은이가 있었다.  

한국 사람이지만 일본인을 양부로 두고 일본인 행세를 하는 '기노시타 쇼죠'라는 청년인데.  

나이 31세,
상해 소재 일본인 인쇄소 점원,
봉급을 타면 술에 취해 사치와 호사를 즐기는 건달.

이것이 겉으로 드러난 그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백범은 그가 단순한 건달이 아님을 간파하고 여러 차례 비밀리에 면담을 갖고 자신이 조직한 '한인애국단'에 가입시킨다.  

그가 바로 1932년 오늘(1/8일)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신년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일왕 '히로히토'를 겨냥하여 수류탄을 던진 독립투사 '이봉창'이다.  

아쉽게도 히로히토가 죽지 않아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가 신격화해 놓은 일본 왕의 행차에,
그것도 일본의 수도인 도쿄에서 폭탄을 던져 타격을 가하려 했던 일은 한국 독립운동의 강인성과 한국민의 지속적인 저항성을 세계에 과시한 것이었다.

 

 

 

 

 

 

 

 

 

 

Posted by 지상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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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퀴리(Marie S. Curie, 1867~1934)는 여성 과학자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녀의 이름 앞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닌다.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최초로 노벨상을 두 번이나 받은 사람,

여성 최초의 소르본 대학교 교수,

프랑스 의학아카데미 최초의 여성 회원 등등.


마리 퀴리 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이야기도 많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우수한 성적으로 학업을 마쳤던 여대생,

방사능 연구에 미친 듯이 매달렸던 과학자,

그리고 결국은 방사능 때문에 병에 걸려 쓸쓸히 죽어 간 순교자...

 

 

피에르와 마리,

두 사람이 결혼한 해인 1895년은 독일의 과학자 빌헬름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한 해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프랑스의 앙리 베크렐이 우라늄이 포함된 광석의 특이한 성질, 즉 인광(燐光) 방출 현상을 발견했다.


이 두 가지 발견에 자극을 받은 마리는 그런 특이한 성질에 관해 연구하기로 마음 먹었다.

남편 피에르의 도움을 받아가며 우라늄의 성질을 연구하고 실험하던 중, 마리는 우라늄보다 훨씬 강한 빛을 방출하는 원소를 발견했다.


마리는 이 새로운 원소에 조국 폴란드의 이름을 따서 ‘폴로늄’이란 이름을 붙였다.

1898년 7월, 폴로늄에 관한 논문을 쓰면서, 마리는 ‘방사능’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그 해 오늘(12/26일), 강력한 방사능을 방출하는 새로운 원소를 또 발견하고, 그것에 라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순수한 라듐을 분리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순수한 라듐을 분리하는 일은 엄청나게 고된 일이었다. 피치블렌드란 광물 몇 톤을 화학적으로 정제해야 했다. 부부는 비가 새는 헛간을 실험실 삼아 밤낮없이 열심히 연구했다.


그리고 1902년 4월 20일, 마침내 순수한 라듐 0.1그램을 분리해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 공로를 인정 받아 이듬해인 1903년 부부는 앙리 베크렐과 공동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피에르 퀴리는 노벨상 수상 기념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라듐은 범죄자들의 손에 들어가면 위험한 물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바로 이 자리에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자연의 비밀을 캐는 것이 인류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그 비밀을 안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 만큼 인류는 성숙한가,

아니면 오히려 해로운 지식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닌가”


마리의 뛰어난 업적 중 하나는 질병 치료와 방사능 연구를 지원하기 위해 라듐을 축적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한 일이었다. 마리는 자신의 노력으로 0.5그램의 라듐을 모았지만 본격적인 연구를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그러던 중 1921년에 미국에서 모금 운동이 전개되어 라듐을 구입하기 위한 자금이 모였다. 친구 소개로 만난 '마리 멜로니라'는 저널리스트 덕분이었다. 그는 마리와 최초로 공식적인 인터뷰를 한 사람인데, 인터뷰 대가로 마리에게 라듐 시료 1그램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드디어 그해 말 미국의 하딩(Warren G. Harding) 대통령은 모금된 자금으로 구입한 라듐을 마리에게 기증했다. 그것은 1930년에 입자 가속기가 출현할 때까지 핵물리학자들의 훌륭한 연구 수단이 되었으며, 실제로 딸 이렌과 사위 졸리오가 인공방사능을 발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마리의 건강은 점점 나빠졌다. 백내장 수술을 네 번이나 받았고 1931년부터는 손가락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백내장은 방사능 병이 생긴 후 나타나는 첫 번째 징조이다.


퀴리 부부가 연구를 시작할 때만 해도 방사능의 위험은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심지어 피에르는 액체 상태의 라듐이 든 시험관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으며, 마리는 방사능 물질을 두 사람의 침대 머리맡에 두기도 했다. 결국 마리는 1934년 알프스 산맥 밑에 있는 한 요양원에서 죽었다.

사위 졸리오가 마리의 실험 노트를 조사해 보니 엄청난 양의 방사선으로 오염되어 있었다.

결국 마리는 자신의 연구에 대한 순교자였던 셈이다.


많은 사람이 마리 퀴리의 죽음을 슬퍼하는 글을 썼다.

그중에서 아인슈타인이 쓴 글이 가장 감동적이다.

"힘과 의지의 순수함, 자신에 대한 철저한 엄격함, 뚜렷한 주관,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판단력, 이 모든 것이 한 개인에게서 발견된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입니다. …… 그녀가 위대한 과학적 업적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은 대담한 직관에 의지한 결과가 아니라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의 어려움 속에서 헌신적으로 집요하게 파고든 노력의 결과입니다."




 

Posted by 지상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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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바이올리니스트가 영국에서 5000원짜리 샌드위치를 사먹다가 21억 짜리 바이올린을 잃어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몇 년전 있었다.


잃어버린 악기가 바로 수십억을 호가하는 악기중의 악기 ‘스트라디바리우스‘


1721년산 ‘레이디 블런트’라는 별명을 가진 바이올린이 2011년 역대 최고가인 172억에 낙찰되었다.


이 악기를 만든 사람은 바로 이탈리아의 악기 제작자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


그는 바이올린뿐만 아니라 비올라, 첼로 등 모두 1100여 점의 악기를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고, 이중 절반 정도가 대략 남아있다고 추정된다.


그의 악기는 모양과 색채가 아름다우며, 음색이 매우 풍부하고 화려하기로 유명하다.


이 악기의 비밀을 풀기 위해 그동안 수많은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현재 기술로도 그 소리를 만들 수 없다고 한다.


1837년 오늘(12/18일) 93세의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는 바이올린 제작에 대한 그의 테크닉과 기법을 끝내 전수하지 않은채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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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상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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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오늘(12/17일)

라이트 형제는 엔진을 설치한 '플라이어'호를 타고 12초동안 36미터를 나는데 성공한다.

비록 시작은 미미하였지만 그 발명의 파괴력은 굉장했다.

이후 '비행기'라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더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었고, 빠르게 연구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세계 1차대전이 일어나고 초반에 무시되던 비행기도 정찰용으로 그 효용성을 인정받았고,
바로 그 적의 정찰용 비행기를 격추하기 위해 전투기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1919년 비행기가 대서양을 횡단하게 되고,
1939년에는 제트기가,
1947년에는 초음속 비행기가,
1952년 제트여객기가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1958년 보잉 '707'이 상업적으로 성공하면서 항공운송의 시대를 열게 된다.

항공사 오너 자식의 갑질 때문에 많이 씨끄러운 요즘...

평생 독신으로 살다간 라이트 형제가 새삼 존경스럽네요!


 

 

 

 

 

 

 

 

 

 

 

Posted by 지상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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